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을 뜨겁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혐오증이 있다고까지도 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양옆에 사람이 앉는 게 싫어서 구석자리를 찾아 맨 앞칸까지 가곤 한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 싫으면 연기자라도 되어야 하는 거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냉소주의였고, 정확하게 말하면 비겁했다. 불의를 질끈 잘 참는다. 타인들이 원하는 연기를 잠시 해주면 내 자유가 더 확보된다는 걸 일찍 영악하게 깨우친 거다." p. 8
"솔직히 내가 쓰는 글의 출발점에는 '나같이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조차 자꾸 접하다보니 결국은 깨닫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더라. 하물며 나보다 훨씬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보고 듣는다면 어떻겠나. 내가 겪은 것들을 알려드리기라도 하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p. 12
"나는 그저 이런 생각으로 산다. 가능한 한 남에게 폐나 끼치지 말자. 그런 한도 내에서 한 번 사는 인생 하고싶은 것 하며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 인생을 즐기되, 이왕이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남에게도 좀 잘해주자. 큰 희생까지는 못하겠고 여력이 있다면 말이다." p. 17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때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라도 해본 적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p. 23
"결국 우리가 더 불행한 이유인 수직적 가치관을 버리고 수평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의 존중, 아니 그걸 넘어서 다양성을 숭상하는 것이 사회 다수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첩경이다. 처음에는 위선이어도 좋고, 듣기 좋은 사탕발림이어도 좋다. 성숙한 가치상대주의가 내면화될 때까지 의식적으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한 가치의 미덕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p. 55
"그런데 부장판사가 '글쓰기'를 단지 그냥 즐거워서 한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런 분들은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이렇게 물어본다. "그런데, 이름 알려서 나중에 정치를 하려는 생각인 거지?" 그럴 때면 참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우선 글쓰기와 '정치'라는 것이 어떤 논리적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문은 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직업이나 성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그 이름도 위대하신 '정치인'이라는 최종 포식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점이다." p. 60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발전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무엇에 주목하느냐의 문제라면 나는 이왕이면 발전하는 모습에 주목하고 싶다.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p. 110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p. 133
"인간 행위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문학 이외에 육하원칙이 지배하는 신문기사가 있다. 두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은 결국 인간 내면의 작용인데, 기자들은 주로 외형적 행위와 그 결과에만 치중하고 내면의 동기는 돈, 욕정, 복수심 등으로 간명하게 유형화하곤 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을 쉽게 이해하길 원하고, 누가 나쁜 놈이고 누가 착한 놈인지 누구에게 분노하면 되는지 결론부터 알려주기를 성마르게 재촉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분노는 즉각적이고 선명한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으로 일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냉정한 '팩트' 집합으로 보이는 신문기사보다 주관적인 내면고백 덩어리로 보이는 문학이 실제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을 더 잘 설명해줄 때가 많다." p. 154
"사실 기업의 학벌 타령은 사회적 배려와 공정성 이전에 효율성 차원에서 어리석다고 본다. 판을 흔드는 아이디어를 불쑥 내는 부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관리자들의 할 일이다. 그게 부담스러운 관리자는 무능한 거니까 그쪽이 나가야 하고. 학벌 타령은 이 글로벌 경쟁 시대에 우리 기업이 아직 배가 덜 고프다는 증거다. 소위 '오너 경영자'들은 뭐하는 걸까. 이런 벽을 과감히 깨고 패러다임을 바꾸기는커녕 회사에 손해 끼치는 일만 벌이고 있다면 왜 그들이 필요한 걸까." p. 166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히 대단한 명답을 제시해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깔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오직 진심만이 그 신뢰를 얻는 열쇠일 것이다. 조정 달인의 비결은 아마도 이것이었던 것 같다." p. 174
"사적으로 만나보면 큰 기업가들도 별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다. 상식과 선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 문제는 기업가 개인이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이윤 창출과 효율성이라는 기업의 논리가 더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과 자본주의는 사회를 미래로 끌고나가는 엔진이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브레이크가 없으면 자기 자신도 원치 않는 파멸로 달려갈 수 있다. 개별기업 간의 무한경쟁만으로는 결국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으니 시장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도 합리적으로 타협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p. 191
"하긴 정신연령이 낮은 나 역시 굳이 무슨 주의자인지 물으신다면 모든 집단주의를 혐오하는 '전투적 개인주의자'이며, 이념보다는 태도가 후진 사람, 그리고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p. 207
"게다가 무엇을 시도하고 실질적인 일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남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창작자보다 평론가가 많다고나 할까. 사실 비평할 논리야 얼마나 많은가. 미봉책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해결이라고 볼 수 없다, 구조적인 문제인데 현상만 일부 건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름 노력은 한 것 같지만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력이라도 해보려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안한다." p. 267
"낯선 것에 대한 공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사회가 보여준 것은 과학적 판단을 존중하는 합리주의, 어떠한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합리적 근거와 소신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전문가들,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함부로 책임자와 대응방식을 바꾸지 않는 뚝심 있는 시스템, 그리고 단 한 명의 자국민도 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연대감을 표시하며 국민을 안심시킨 리더십이다." p.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