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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들과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모님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재희네를 수차례 들락거리면서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어떤 밤에는 눈물이 날 정도로 질투했던 것이 바로 그런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그들로부터 나눠 받을 수 있게 될지도 몰랐던 어떤 것이었다."


p. 71



"이렇게 앉아서 몇 번의 겨울을 더 맞게 될까. 몇 번의 봄과 몇 번의 여름을.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p. 110



"그가 무뚝뚝하게, 즉시 대꾸했다. 그녀가 그의 상태를 감각하고 입을 닫는 것을 그는 느꼈다. 변명하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한순간의 어조나 침묵, 한마디 말로 그들은 서로의 상태를 알아챘다. 그녀가 작은 돌처럼 위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p. 150



"아버지는 이제 늙었고 당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말에 유독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당신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 아무리 사소한 맥락이라도 그 같은 말을 들으면 그는 화를 참지 못한다. 아랫집 노인들, 친척들, 통신회사 서비스센터의 직원,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빨개지거나 파랗게 질려서 따져 묻고 씩씩거리고 머리를 흔들고 혼자 구석진 곳으로 가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돌아와 분통을 터뜨리며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묻는다. 그래서 지금 잘못한 사람이 나라는 거냐? 내 잘못이라고? 내가 잘못이냐?"


p. 169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p.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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