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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땅, ​​임철우

"도시는 온종일 안개에 덮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그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도 기민한 점령군의 병사들처럼 그것은 소리 없이 스며들어와 집집의 지붕들을 내리덮고, 벽보가 어지러이 붙어 있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대문마다의 문패를 훑어보기도 하고, 더러는 담을 넘어와 열린 창문을 통해 함부로 남의 집 침실까지 훔쳐보기도 하면서 어느 틈에 도시를 완전히 장악해버리고 말았다. 어디를 보아도 모두 안개뿐이었다. 안개. 안개."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그치고 나서부터 시작된 이들의 소동은 동이 훤히 터올 때까지, 그리고 그들의 목청이 쉬고 두 다리에서 힘이 후줄근하게 빠져나갈 즈음까지 계속되었다. 그동안 읍내 2천여 주민들 중 상당수 사람들은 눈앞에 당장 들이닥칠 사태를 예상하며 벌써 산송장 꼴이 되어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드디어 활개치고 나설 날이 오긴 왔구나 하고 회심에 찬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대체 앞으로 세상이 어찌 돌아갈 것인가 하는 두려움과 더불어, 제 목숨 하나를 온전히 부지하려면 어떤 현명하고 적절한 방도를 취해야 될 것인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놓고 저마다 절박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p. 29


"거룩한 소명을 받은 어느 몰락한 왕가의 후예처럼 나는 문득 엄숙해지고 진지해져서, 별안간에 심장이 급작스레 툭탁거리며 튀어 오르기 시작함을 느끼면서 한동안 잠자코 상무 앞에 서 있었다." p. 244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제각기 동정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펄쩍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꾹 참느라, 하나같이 울퉁불퉁한 거울 속의 어긋나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p. 245


"그러나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런 부당한 처사에 응당 쌍심지를 켜들고 분연히 일어서야 마땅할 이층 식구들의 무기력하고도 김빠진 태도였다. 그들은 여전히 놈의 앞에서 맵시 있게 먹을 것을 흔들어대면서도 그걸 아주 당연하고도 옳은 일인 양 여기고 있었다. 셋방 사람들은 주인집이 갖는 어떤 권위와 충돌하기를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건 묵묵한 패배라고 해야 옳았다." p. 255


"아아, 세상엔 얼마나 많은 허위의 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죽어버린 언어들만 입술로 퐁퐁 불어 올릴 뿐이야. 떠도는 말들. 뿌리도 형체도 없이 부유하는 저 유령의 언어들······" p.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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